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2019)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적 변신뿐만 아니라 정신 질환, 사회적 소외, 폭력을 원초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개봉과 동시에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영화는 많은 현실 세계 도시의 사회경제적 골칫거리를 반영하는 암울한 고담시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중심에는 치료받지 못한 정신 질환과 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실패한 스탠딩 코미디언 아서 플렉이 있으며, 조커로의 전락은 끔찍하면서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아서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그의 폭력이 이해될 수 있는지, 아니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불편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아서 플렉: 조커
아서 플렉은 본래부터 사악한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그를 체계적인 무관심의 산물로 그립니다. 정신 질환이 있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구타당하고, 결국 사회에서 버려지고 무너집니다. 고담의 사회 공공 서비스는 중단되고, 지원금은 삭감되고, 그가 가진 하나의 매체인 코미디조차도 굴욕의 무대가 됩니다. 이 맥락에서 조커는 관객에게 자신이 결국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 아서가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폭력이 그의 유일한 목소리가 될 정도로 망가진 사람을 만든 책임이 사회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질문은 영화의 도덕적 모호성의 핵심입니다. 아서가 지하철에서 자신을 폭행한 세 명의 취객을 살해하는 것은 처음에는 정당방위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은 계급 간의 다툼을 촉발하고 아서는 서민들의 영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위험한 것은 폭력이 소외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사가 어떻게 왜곡되는지에 있습니다. 영화는 아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도덕적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관객들의 공감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지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화가 아서의 행동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의 인생은 비극적이며 관객들은 분노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지만, 폭력, 특히 무고한 사람들을 향한 살인의 결과는 충격적이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조커는 아서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묘사함으로써 사회에서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갑론을박을 불러일으킵니다.
미디어와 대중
영화의 윤리적 난제에서 또 다른 핵심 요소는 미디어의 역할과 대중의 인식이 아서의 타락을 부추긴 방식입니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서 아서의 스탠드업 공연 실패 장면이 방영되자 아서는 대중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미디어에서의 조롱 행위는 아서의 개인적인 실패를 국민적인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며 더 나아가 수치심과 소외감을 무기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서가 머레이의 쇼에 출연하기로 결정 내린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깊은 열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무대에 오른 아서는 불우한 가정사 고백 이후 자신을 모욕한 바로 그 힘에 둘러싸여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불씨가 됩니다. 이는 그가 조커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전환점이 됩니다. 아서가 생방송으로 머레이를 죽였을 때, 그 행동은 광기가 아니라 계산된 보복입니다. 조커는 서사의 유혹적인 힘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지하철 살인 사건 이후 고담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발생한 폭동은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서 자신은 본인의 행동이 정치적 동기나 어떤 거창한 이유로 인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미디어와 대중은 그를 하나의 상징, 순교자로 신격화합니다. 이러한 점은 대중이나 미디어에 의해 폭력이 윤리적 근거를 완전히 상실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개인의 고통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조커는 개인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한 도덕적 질문을 제시합니다. 영화는 간단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신병으로 인해 무시당하고, 대중들의 조롱을 받고,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조커는 평생의 버림과 소외로 형성된 자신의 타락을 고통으로 인한 결과물로 폭력에 빠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트라우마로 다른 무고한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기로 한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이 영화를 특히 자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서를 영웅이나 악당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고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어머니를 살해하고 친절한 동료를 배신하고 무고한 낯선 사람을 살해하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전환점은 영웅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입니다. 폭력은 아무리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을 미화하는 데 선을 넘지 않고 관객에게 아서 플렉의 선택을 변명하지도, 존중해달라고 하지도, 노골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사회적 소외가 괴물을 만들 수 있는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고통과 피해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연민이 없는 세상이 어떻게 폭력을 조장할 수 있는지를 밝히며, 그 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아서 플렉의 어둠 속 타락을 반영하는 실제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다.